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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서부 어슬렁거리다(1)

평택 팽성객사를 어슬렁거리다.  

지하철 1호선 평택역에서 하차, 역앞버스정류장서 안정리쪽버스환승하여, 최근 미군기지 이전으로 핫 이슈인 캠프험프리가는 길목 객사리에서 하차하면 팽성 객사를 어슬렁거릴수 있다.

 

불과 10 수년전만 해도 어수선하여 맘까지 아프던 팽성객사는 말끔한 모습으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나를 맞아준다. 시골 작은 동네에 들어선 L패스트후드점 뒤편에 있는 객사를 어슬렁거린다. 두리번거리다 구입한 한잔의 아메리카노를 사러간 L패스트후드점의 매니저랑 몇마디 인사를 나누곤 곧 객사를 어슬렁거렸다. 
 
최근 미군기지이전, 삼성고덕단지입성, 지제역 GTX연결로 부동산 지가가 상승하고, 서울특별시 '평택구'가 될거라는등의 부동산지가 상한가를 달리는 평택시 팽성읍은 과거엔 소소한 지방의 작은 군소읍이었다. 
 
과거 많은 평택의 전답이 여러 궁가(宮家)의 소유이었다보니, 면세 등의 이유로 실제 세수가 적어, 대체적으로 재정이 궁핍했다. 그러다보니, 성장발전이 더딘것도 사실이다. 경부철도부설후 역주변이 상가로 발전하게 되다보니, 팽성읍은 평택서부의 작고 초라한 읍에 불과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복구책에 힘입어 전답이 개간되기 시작해 조금씩 늘어났지만, 시대상황에 따라 줄어드는 경우도 있었다. 평택군은 충청남도와 경기도로의 편입을 오가다보니, 더욱 발전이 더딘 기지촌부근의 작은 소읍에 불가했다.

 

특히 팽성읍에 미군의 캠프험프리가 주둔하게되면서 안정리가 상업지구로 기지촌으로서의 역활을 하다보니, 상대적으로 과거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영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되었고 최근까지 팽성은 미군기지로 가는길에 스치게되는 작은 버스정류장정도가 되었었다.   
 
필자에게 그저 작고 평범한 소읍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팽성은 한때는 삼남과 한양을 잇은 길목위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평택의 행정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 이를 뒷 받침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지로서 '팽성 객사'를 들 수 있다. 평택의 중요한 유적지 중의 하나이다. 
 
'객사'란 한양에서 지방으로 파견나가는 관리들이나 혹은 다른 지방의 관리들이 방문했을때 유숙하였던 곳으로 나라에서 경영하는 관사를 말한다. 객사가 만들어진 본래 목적이 사신이나 타지방관리들이 유숙하면서 연회를 즐겼던 곳이다. 고려초에 이미 만들어지기 시작한 객사는 대게의 지방객사가  주요 길목이나 행정중심지에 자리잡고 지방을 방문하는 관리들의 공적인 뒷바라지가 이루어지는곳으로 중앙관리가 지방 방문 때에 묵었던 곳이라 말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객사는 각 고을마다에 객사사(客舍史)라는 아전을 별도로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세종실록에 보면 우량을 측정하기 위한 축우기를 전국적으로 보급 실시할 때 지방의 각 고을은 '객사의 뜰 가운데에 대를 만들어 측우기를 대위에 두도록 하며...'라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객사는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방행정 기관이였음을 그리고 백성과 관이 소통하는 장소임을 확인할 수 있다.

 

객사는 시대와 지역을 달리하면서 조금씩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조선의 전시대 목조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객사의 건물구조는 그 시대의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그 고을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서울을 향해 절을 할 수 있게한(망궐래) 정당을 중심에 두고 좌우에는 날개같은 익실(翼室)을 두어 유숙하는 사람들이 거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 숙박및 연회를 하는 공간을 두었다.

 

또한 중문과 외문 그리고 회랑등이 부속으로 딸려 있다. 전패를 모셨던 정당은 바닥에 전돌을 깔았고 지붕도 좌우 익실과 높이를 달리하여 한층 더 높게 올려 건물의 격을 달리하였고 익실의 한칸은 온돌방으로 하였다.

 

팽성객사는 역사적사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팽성객사는 원래는 작은 규모였던 것을 영조와 순조 때 그리고 현종 때 크게 중창하였다는데 그후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 목재들이 썩어가던 것을 1993년 부터 3년간에 걸쳐 복원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팽성객사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객사리'라는 지명을 하고 있는것으로 미루어보아 객사가 가졌던 영향력의 무게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지금의 객사리 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객사건물은 너른 마당을 가운데 두고, 행랑채와 본 건물이 마주보고 있고 그 가장자리로는 나즉한 담장을 둘렀다.  유달리 부침의 사연이 많았던 팽성이 부자동네로 살았던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지방 유교정치를 대표하는 시스템인 객사(客舍)가 유지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팽성객사의 역사적 위치는 공교육기관이었던 향교도 객사와 멀지 않은곳에 있어 평택이라는 지역 내에서의 팽성이 가지는 위치를 가름할수 있다.   
 
그간의 세월을 이겨낸 객사는 일제강점기에는 양조장으로 개조 사용됐고, 이후 주택으로 사용되던 객사를 평택군이 매입해 1994년에 그 면모를 일신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0 여억원을 들여 정비ᆞ보수를 한것을보면 팽성 역사상 가장  큰 세수를 걷어들인 시대에 살고 있는듯 하다. 
 
서울서 가까운 수도권에 잘보존된 객사와 편리한 교통으로 접근성이 좋은 팽성객사는 어슬렁거릴만한 곳이다. 안정리 등 캠프험프리쪽을 함께 어슬렁거려보며, 역사와 시대의 변화를 느껴봄도 하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평택지역을 혈연관계로 엮인지 30 여년을 지나서야, 팽성객사를 어슬렁거려보게 된것은 너무나 가까운곳에 있어서 오히려 방문이 더뎌진곳이다. 명절등에 오가며 어슬렁거리고 싶었던 호기심을 시모의 치매증상으로 시집살이가 옅어진 시기에 방문한것이 개인사의 질곡을 보는듯 해서 슬프다. 
 
캠프험프리의 확장으로 팽성지역이 오히려 더 확대된 느낌속에서, 미군부대이전을 다 끝낸후의 팽성을 상상해본다. 
 
조선시대에 궁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객사에서 신하가 궐패를 모셔놓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에 멀리 있는 궁궐을 향해 예를 지내는 것을 말하는 망궐래가 2015 년부터 재현되고 있다.

 

이는 문화재청이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문화콘텐츠로 활용해 국민과 함께 하는 역사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취지로 공모한 ‘생생문화재 사업’의 일환으로 평택시는 ‘숨쉬는 500년 객사’가 선정돼 2015년부터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데, 9월 한미양국이  팽성에서 많은 행사를 계획하여 국제적면모와 역사의 발자취가 공존하는곳이다.


팽성객사의 역사적 의미를 되세기며 평택시에서 마련한 각종 행사 참관 및 객사를 어슬렁거려봄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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