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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h"의 산책

흔적

주일 오후,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 뒷산 언덕길을 오르다 보니, 발 밑에 가랑잎이 구르고, 찬 바람이 주름 진 얼굴에 스치고 간다.


아직도 고운데 떠나야 하는 낙엽들이 애처러워서, 오색 빛깔의 낙엽들을 책갈피에 소중히 말려 거실 fire place위에 붙여 놓고 바라 본다. 또 가을이 가는구나!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다. 지향 없이 구르는 낙엽, 낙엽을 몰고 가는 바람, 푸른 잎들도 가고,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 이번 겨울 방학에는 어느 명승지에 가볼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유학생이었던 남편 덕분에 이사를 스무번이나 했는데도, 학회를 핑계 삼아 온 세계를 누비며 여행을 많이도 다녔는데도, 가을이 깊어지면 또 어딘가로 낙엽처럼 막연히 떠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언제 부터인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혹시 집으로 다시 돌아 오지 못해도, '내가 있던 자리가 부끄럽지 않게 정리가 되어 있어야 할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언젠가 아주 떠나는 때를 생각하며, 이제껏 살아 온 흔적들을 정리해야 할 듯하다. 남편과 41년을 함께 살면서도, 경영학을 가르치는 남편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강의하는지, 설명을 들어도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다만 학위 논문 서문에 성경(전도서) 말씀을 인용하여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말을 썼다는 그 이야기만 기억할 뿐이다. 한 평생 학자로 살아 온 남편의 논문들을 모아서 은퇴하기 전에 책으로 엮어 아이들에게 남겨 주고 싶다.

 

그리고 우리 부부가 소소한 일상을 쓴 글들, 편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남겨 주고 싶은 사진들을 골라 또 하나의 책을 만들기로 하였다. 논문집은 영어지만, 미국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한국말로 부모의 심정을 적은 글을 얼마나 이해 할지 모르니 사진들을 많이 넣기로 헀다.

 

소심한 성격 탓에 남은 사진들을 버리려니 우리의 지난 역사를 지우는 듯 아프다. 우리집 작은 텃 밭의 오이, 호박, 고추들의 사진들도 우리 가족의 이야기 책에 넣기로 했다. 빛 바랜 옛 사진들을 보니 파노라마처럼 떠 오르는 일들이 있다. 대학 다닐 때, 가을이면 친한 친구와 신촌역에서 교외선 열차를 타고, 이름 모를 역에 내려 갈대를 한아름 꺾어 안고,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 오면서 갈대 향기 속에 얼굴을 묻은 사진들, 남편 따라 제주도로 신혼 여행을 가서 신기하기만 하던 섬의 풍물과 수 많은 추억을 사진에 담았던 그 때도 시월 말이었다.

시월에 태어났기에 어렸을 적 생일에 가장 받고 싶었던 선물이 홍시였다. 지금도 감이 익는 계절 가을이 기다려 진다. 대학 3학년 가을에 친구들과 '설뮈'라는 모임을 만들어 사진을 찍고 전시했던 적이 있다. 전시했던 작품들이 생각난다. 자그만 몸매에 잔주름이 푸근하고, 나와 가장 비슷한 모습이셨던, 묵주를 들고 묵상하시는 외할머니의 사진, 허술한 옆집 담장을 넘어 넝쿨째 넘어 왔던 귀여운 호박 사진, 그리고 고궁, 교정에서 친구들과 찍었던 사진들이 옛이야기를 들려 준다. 결혼 후에는 나이 들어 가는 우리 부부와 커가는 아이들의 사진들이 우리가 얼마나 애면글면 맘고생하면서 살아 왔는지를 보여 준다. 그리고 천진 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 지난날의 추억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9순이 지나신 친정 어머니는 내가 살았던 연희동 집 그 마당에서 오늘도 빨래를 너시고 잡초를 뽑으신다. 재 작년 여름 친정집 거실에 쌓여 있는 사진첩을 정리하고, 간직하고 싶은 사진들을 골라 가져 왔다. 내 아이들 보다도 젊으셨던 고모, 삼촌들의 결혼 사진들이 보존 되어 있었고, 훤칠하게 크시고 온화한 미소로 안아 주시던, 그 시대의 천재 학자이셨던 아버지의 사진들이 그 긴 세월 속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훗날 내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 될까?

남편이 애쓴 덕분에 두 달 만에 편집이 거의 다 되었다. 이제 책의 표지를 green(연두색)으로 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내 푸르던 날 꿈 많던 시절, 중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중학생들에게 매 달 새로운 시를 낭송해 주었던 기억이 떠 오른다. 그 중에 기억 나는 시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이미 가을이 왔지만, 나에게도 푸르른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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