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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지엄마의 이야기

​최정우

엔지 엄마의 좌충우돌  가~드닝

충청도 작은 바닷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아직도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빈들을 보면 가슴이 콩닥거린다.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만한 좁은 밭두렁의 비탈에조차 메주콩을 심어 가꾸던 이들 틈에서 자랐다는 걸, 내 가슴은 영영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제법 넓직한 뒷마당이 있는 집에 살림을 풀고 난 뒤, 마당 한쪽에 놓인 그네에 앉아 있으면 어김없이 그 바다와 그 논두렁의 기억이 밀물처럼 몰려오곤 했다. 그러면 마당 한쪽에 쭈그려앉아 잡초를 뜯었다. 손톱 밑에 낀 까만 흙때가 별스럽게 흐뭇했다. 그리고 얼마잖아 병이 생겼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맘때면 늘 도지는 병이니 그렇게 지나가려니 싶었다. 뉴 잉글랜드의 겨울이 얼마나 악착같은 줄을 이제는 뼛속깊이 깨우쳤음에도 이때만 되면 어김없이 설겅거리는 가슴을 스스로 비웃으며, 다만 기다리겠노라 다짐하였다. 정말로 그럴 작정이었다. 그러던 2월 어느 날, 사흘 연속 화씨 60도에 가까운 햇살이 쌓여 있던 눈들을 말끔히 녹여버리고, 겨우내 단단히 여며져 있던 목련나무 꽃눈들 마저 살그머니 부풀어오르고야 만 그날, 나는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뒷마당에 나와 촉촉한 흙무더기를 발꿈치로 콩콩 찧다가 무작정 뛰쳐나가 차에 올라탄 것이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이미 홈디포 가든 센터에 서 있었다. 마치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서 있었던 것마냥, 천연덕스런 얼굴로, 우두커니. 아직 가드닝 시즌이 시작되기 전이라서 가든 센터는 한산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각종 씨앗들이 진열되어 있는 곳 앞에 섰다.

오이, 호박, 당근, 고추 등 눈에 착착 감겨오는 반가운 것들부터 베이즐, 파슬리, 오레가노 등 그닥 자주 쓰진 않지만 그래도 있으면 요긴한 갖가지 허브들. 그리고 온갖 꽃씨들. 바라만봐도 흐뭇한, 이쁘고 알록달록한 것들.  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화분들이 진열되어 있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모름지기 꽃마다 어울리는 화분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모름지기 화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다, 라는  초짜 가드너의  호기로움으로 무장한 나는 늘 화분 욕심을 낸다. 살림 잘하는 이들이 이쁜 그릇을 탐하는 거랑 비슷하달까, 흠흠.

아기자기하고 오목조목한 화분들을 훑어보다 예사롭지 않게 엉덩이가 빵빵한 화분 하나를 집어들었다. 문득 백자 항아리를 너무나 사랑하여 평생 어여쁜 백자 항아리를 사 모았다는 김환기 화백이 떠올랐다. 나의 불온한 소비 행각을 김환기 화백의 거룩한 예술 취향과 비교한다는 것은 거의 착란에 가까운 오만이었지만, 왠지 기분은 그럴 듯했다. 나는 기꺼이 스타벅스 커피 몇잔을 포기하고 그 화분을 사기로 결심하였다. 참으로 고매하고도 값진 결정이라 자부하면서. 화분의 통통한 엉덩이를 한번 더 쓰다듬고, 살그머니 카터에 내려놓고 나서 고개를 드니 할머니 한분이 바로 내 앞에서 화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꼬리가 새초롬 올라가고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니, 가히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그렇지, 나만 혼자 이렇게 오도방정을 떠는 건 아닌게야. 동지를 만났다는 기쁨에 나도 모르게 헤픈 미소가 흘러나왔다.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왜 안그렇겠냐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어쩔 수 없지, 담주에 분명 눈폭풍이 몰려올텐데….”라고 대답했다. 흐흐흐, 우리는 인사대신 멋적은 웃음을 지으며 헤어졌다.

나는 별다른 사고 없이 (세일중인 알뿌리들을 몽땅 카트에 쓸어담는 일 없이!) 흙 한봉지와 방한용 커버 비닐, 볼수록 왠지 바람난 봄처녀의 뒷태를 닮은 화분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2월의 짧은 해가 어느 덧 기울고 있었다. 나는 점심도 거른 채 그동안 사모은 씨앗들이 담긴 작은 상자를 꺼내놓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씨앗 봉투에 그려진 푸르고 싱싱한 잎파리들이 하나같이 ‘저요, 저요’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모두들 그 비좁고 답답한 봉투밖으로 뛰쳐나와 촉촉한 흙과 따뜻한 태양을 만나고 싶을테니…. 그 중에 어떤 놈을 뽑아야 할지 내내 망설여졌다.

 

먼저 상치씨 봉투를 열고 손바닥에 소르르 쏟아내 보았다. 작고 여리고, 도무지 가망 없어 보이는 씨앗이었다. 이 안에 저토록 싱싱한 생명이 숨어 있다는 것이 언제나처럼 믿기 힘들었다. 다음엔 열무씨를 꺼내 들여다 보았다. 상추씨보다는 제법 그럴듯하게 생겼지만, 씨앗이라기보다는 작은 모래알 같다. 도무지 생명을 품고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아마도 그래서 씨뿌리는 시간은 늘 반신반의하며 숨을 죽이게 되나보다. 그리고 그 손톱만한 것들 위에다 흙까지 덮고나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나보다.

결국 나는 상치와 풋배추 씨를 골랐다. 그리고도 아쉬움이 남아 호박씨와 우엉씨를 작은 컵에다 심었다. 호박씨는 작년에 우리집 담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자라던 녀석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제법 잘생긴 놈을 점찍어 여름 햇살을 흠뻑 받고 노랗게 여물기를 기다렸다가 첫서리가 내린 뒤에야 거둬들인 놈이었다. 두해 연속 유난히 호박 농사가 풍년이 되고 보니 나름 배포가 커진 탓에 엄두를 낸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은 한련 꽃씨는 나의 야심작이자 유망주였다. 작년 봄에 어렵게 얻은 씨를 발아시키려다 실패하고 내내 낙담해 있던 중에, 어느 어여쁜  분이 기르던 한련을 인심좋게 나눠주신 걸 애지중지 길러 씨까지 받은 것이다. 여름내 그 예쁜 꽃과 잎을 보고 또 먹고(!)도 헤어지기가 섭섭해, 어떻게든 함께 겨울을 나겠다고 화분을 집안으로 들여놓았었다.

 

한련은 자주 누런 잎을 떨구고 더이상 꽃대를 올리지 못하면서도 끈질기게 버텨주었다. 그러던 초겨울 어느 날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고, 한련은 까맣게 얼어 죽어버렸다. 다행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씨앗들을 모아 둔 게 있어 다음 해를 기약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한련씨를 심는 내내 가슴이 콩닥콩닥, 여름햇살에 콩깍지 터지는 소리를 낸 것은 심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달쯤 지난 지금, 예상했던 대로 눈폭풍이 왔고 땅은 또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나 거실 창가에 둔 나의 씨앗들은 싹을 틔웠고, 애처롭던 떡잎은 나날이 자라 제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햇빛을 향해 돌아서 있는 그 어린 잎들을 볼 때면 기특하기 그지없다. 생명이 전해주는 단순하고 순수한 설렘, 그리고 다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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