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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철 (보스턴 거주)

첫번째 이야기: 

스콴토 그리고 청교도의 삶을 구한  첫번째 추수감사절


지난해 보스턴에 도착한 후 처음 교회 나간 날이  추수감사절 주일이었다. 그 날 목사님의 설교 예화가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최초의 미국 이주민들과 스콴토(Squanto)의 특별했던 인연에 관한 이야기였다. 내가 과문한 탓에 스콴토에 관하여는 전에 전혀 들어본 적이 없기에 놀라움과 함께 스콴토에 대하여 많은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한 달 쯤 뒤 성탄절에 가족들과 함께 플리머스(Plymouth) 나들이에 나섰다. 그곳에서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비롯하여 초기 정착민에 관한 흔적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물론 스콴토의 머리 나뭇조각도 만날 수 있었다. 

1620년 9월 6일 35명의 퓨리턴(Puritans:청교도)과 67명의 이방인(Strangers: 그들의 교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등 102명을 태운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Plymouth)를 출발했다. 메이플라워호는 길이 30 미터, 무게 180톤짜리 노르웨이 목조 범선이었다. 원래 화물수송선이어서 배엔 고기 썩은 냄새와 기름 냄새 등 악취가 진동했다. 청교도들은 66일간의 길고 위험한 항해 끝에 1620년 11월 11일 육지, 즉 현재의 케이프카드(Cape Cod) 해안을 발견했다. 그곳은 그들의 목적지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 항해하기에는 너무 늦은 계절이라 정착지를 케이프카드 북부 지역으로 결정했다. 그들은 몇 차례에 걸쳐 인근 지역을 탐사한 뒤 한 달여 만인 12월 20일 보스턴에서 동남쪽으로 40마일쯤 떨어진 플리머스록(Plymouth Rock) 해안에 내렸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이주민들은 첫해 겨울에 영양실조와 질병 등으로 반이 죽었다. 이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생존법에 무지했다. 고기잡이에 큰 기대를 걸었으면서도 필요한 도구도 제대로 챙겨오지 않았거니와 고기를 잡는 방법도 몰라서 생존 자체가 위태로울 정도로 어려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621년 3월 16일 이들에게 기적과 같은 행운이 일어났다. 이전에 영국 탐험대에 동행했던 덕분에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디언 사모세트(Samoset, 1590-1653)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며칠 후엔 영국의 런던에도 살았던 스콴토(Squanto, 1585-1622)라는 인디언을 데리고 나타났다. 이들은 청교도들이 부근 왐파노아그(Wampanoags) 인디언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인디언들이 물고기를 잡고 옥수수를 기르는 법을 가르쳐 준 덕분에 백인들은 연명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월 첫 번째 추수 후 정착민들은 추수감사절 파티를 열고 원주민들을 초대했다. 참석자는 정착민 53명, 원주민 90명이었다. 이게 바로 오늘날 미국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의 기원이 된다고 한다. 

스콴토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삶을 살았다. 스콴토는 1605년에 영국의 탐험대에게 납치되어 영국으로 건너가 영어 등을 익힌 후 1614년에 탐험대의 가이드가 되어 미국으로 다시 오게 된다.그런데 일부 영국의 탐험대원들에 의하여 스페인 말라카로 노예로 팔려갈 뻔하다 수도사들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다시 가게 된다.  그 후로 탐험대의 일원이 돼서 몇 차례나 미국을 더 다녀온 뒤 1919년애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38년 생애중 대서양을 여섯 번 건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최초의 이주민과 원주민간의 중간조정자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스콴토의 동족으로부터는 신뢰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동족에 의한 독살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콴토 또는 스콴텀(Squantum)이라는 이름은 플리머스나 퀸시(Quincy) 지역에서 길 이름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일부 원주민들은 추수감사절의 의미를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스콴토가 베풀었던 은혜가 재앙의 씨앗이 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스콴토가 했던 일들은 명백한 실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1975년부터 매년 추수감사절 때마다 “반(反)추수감사절(Unthanksgiving Day)” 행사를 열어 억울하게 죽은 조상들을 추모하고 있다. 2005년 11월 24일 미국의 심장부 뉴욕이 화려한 추수감사절 퍼레이드로 흥청이던 날, 북아메리카 원주민 3,000명은 인디언 권리운동의 성지(聖地)인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알카트라즈 섬을 찾아 추수감사절을 애도하면서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 아니라 추수강탈절(Thankstaking Day)이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식량을 나눠주며 백인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면서 “기력을 차린 백인들은 원주민을 배반하고 땅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관점을 달리하면 누구의 축제일은 또 다른 누구에게는 애도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두번째 만난 남자, 소로우 (Henry David Thoreau) 와 월든 폰드 (Walden Pond)

수년전 한국에서는 <월든(Walden)>이라는 단행본이 오랜 기간 동안 베스트셀러로 대단한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게으른 탓에 책을 다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대충의 스토리는 알고 있었다.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가신 법정 스님이 월든의 저자 소로(Henry David Thoreau)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스님은 월든 호수를 생전에 세 번이나 방문하였다고 한다.

꽃피는 봄이 되면 호수의 풍광이 더욱 좋아지리라는 것쯤이야 쉽게 짐작되지만 참을 수 없는 호기심 때문에 1월 어느 날 꽁꽁 얼어붙은 월든 호수를 찾았다. 월든 호수는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Concord)에 위치하고 있으니 보스턴에서는 차로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호수 한 쪽에 소로의 동상과 함께 그가 손수 지어서 살았던 오두막과 책상 등 살림살이 모형들이 잘 설치되어 있었다. 실물과 혼동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모형들 덕에 어렴풋이나마 소로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봄이나 여름에 다시 한 번 들리면  또 다른 월든 호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1845년 3월 말, 27세의 젊은 시인 소로가 월든 호수 북쪽 비탈진 언덕에 자신이 기거할 오두막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 7월 4일 미국독립기념일에 입주하게 된다. 19세기의 진정한 자유주의자 소로의 2년 2개월 2일 동안의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이었으며, 그곳에서의 삶은 그의 작은 오두막을 어떤 거대한 건축물보다 위대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소로는 왜 이런 모험을 감행했을까? 그가 보기에 사람들은 집의 노예였고 재산의 노예였고 일의 노예였다. 그는 월든 호숫가에 작은 집을 짓고 농사지어 자급자족하면서 여유 있게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노예로서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면서, 그리고 최대한 여가를 즐길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소로가 생각하는 자유인의 길이었다. 그는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의 삶을 낱낱이 기록했다. 그 기록이 바로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비견되는 명작 <월든>이다. 

잠시라도 한 눈 팔게 되면 뒤처지는 현대인에게는 시대착오적인 생각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월든>이 소로가 살았던 때보다 물질문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20세기 후반, 특히 21세기이후에 더욱 각광받는 이유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소로의 근본적인 저항은 <월든>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소로의 저항이 잘못된 제도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릇된 사고방식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소로와 에머슨의 삶을 함께 정리한 하몬 스미스는 소로의 마지막 장면을 매우 감동적으로 그렸다. 스미스는 소로가 밀려오는 피로 속에서 생의 최후를 보냈지만 마지막까지 여유를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1862년 5월 6일, 소로는 여동생 소피아에게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의 일주일>의 마지막 장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내슈아 어귀를 지나쳤고, 곧 새먼브룩도 지나칠 즈음, 우리의 배를 가로막는 것은 바람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제야 멋진 항해가 시작되는군.” 그리고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소로는 인생을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자유롭게 사는 것이 그의 소중한 가치였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는 때로 고립을 자초했고 사회와 싸웠고 글을 썼다.

<월든>에는 오늘의 세계를 읽는 해법이 들어 있다. 우리들은 모두 경제논리의 노예이며, 더 세부적으로는 집의 노예이며 직장의 노예이며 돈의 노예이며 길의 노예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인간은 영원히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월든>의 한 대목을 옮겨보면, “내가 숲속으로 들어간 것은 인생을 의도적으로 살아보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을 직면해보려는 것이었으며, 인생이 가르치는 바를 내가 배울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했던 것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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