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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Interview

"화음 보스턴 쳄버 오케스트라" 장수인 단장을 만나다…

완성된 무대보다 완벽을 위해 노력하는 리허설 무대가 더  아름답다.

뉴욕, 보스턴, LA, 가깝게는 서울 등 거의 모든 대도시에 그 도시 커뮤니티를 대표하는 유명한 오케스트라가 있듯 우리 보스턴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우리만의 오케스트라가 있다. 바로 '화음 보스턴 쳄버 오케스트라'이다. 이 한인 오케스트라를 수년간 묵묵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이끌고 있는 장수인 단장을 만나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 보고자 한다.

어린시절 그리고 음악과의 만남

 

"화음 보스턴 쳄버 오케스트라" 장수인 단장은 대한민국 예술교육의 요람 "예원학교" 1회 졸업생이다. 1960년대 당시 예원학교 그것도 1기라 함은 그녀가 평범치 않은 집안의 자녀라는 것 쯤은 그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볼 수 있는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독립유공자이자 역사학자인 장도빈선생의 손녀이자, 한때 재계서열 20위권으로 대한민국 경제계를 호령하던 모그룹의 창업자 장치건 전 회장의 오남매중 셋째딸이다.

 

어머니 또한 그시대에 피아니스트였다니 그녀의 어린시절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된다. 그녀가 음악을 시작하게된 계기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 영향이 컸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노래가 너무 하고싶어 평소 네 딸 중 한 아이는 꼭 성악을 했으면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다고 한다. 결국 네 딸 중 장수인 단장이 어머니의 희망으로 낙점을 받았고 이때 부터 KBS 어린이 합창단, 한국일보 합창단 등 많은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 했다.

예원, 예고에서 서울음대 까지.. 본격적인 성악도의 길을 걷다

 

어린이합창단 활동을 열심히 하던 중 1967년 우리나라 최초로 예술전문학교인 "예원학교"가 문을 열었다.  어머니는 당장 입학원서를 밀어 넣었고 합격통지서를 받아들게 되었다. 장단장은 그 당시 "나 보다도 어머니가 더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예술교육의 요람이라는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시작되어 서울음대의 정통 음악교육까지  10년이상 최고수준의 전문음악인 교육을 받아오면서 음악이 그녀 인생의 전부를 차지 하였기에 아마도 오늘날의 합창단 단장, 오케스트라 단장의 자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스스로가 돋보이는 독창 보다는 여럿이 마음을 합쳐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 내는 합창음악에 늘 더 매료되었다.  아직도 새로운 악보를 받아들때 가슴이 뛴다는 그녀는 각자 다른 화음을 서로가 귀기울이고 노력하며 완벽한 곡으로 맞추어가는 그 과정이 그에게 많은 성취감을 안겨주는 행복한 순간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까? 그녀는 프리마돈나의 길 보다는 합창단에 더 마음을 두었다. 음악 콩클에서 1등도 해 보았지만 그녀의 선택은 역시 합창단이었다.  200대1의 경쟁을 뚫고 서울시립합창단에 입단해 단원들과 함께 마음껏 노래도 불러 봤고 미국 Professional 합창단 솔리스트로 3년간 활동하고 유럽연주여행을 다니며 그녀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기도 하였다.

남편과의 만남, 3년의 기다림, 유학, 그리고 행복한 가정…

 

서울대 재학시절 유학을 위해 영어를 공부하던 중 우연히 어학당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눈여겨 보아 왔던 한 남학생… 그러나 그 남학생이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않아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았다며 웃음을 짓는다.

 

그러나 그 남학생은 석달 후 군입대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도 그녀가 마음에 있었지만 군3년의 공백을 메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장단장의 선택은 기다림 이었다. 아니 솔직히 기다림 이라기 보다는 군인과의 3년간 열애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녀는 거의 매주 철원으로 면회를 갔다. 열애가 지속되고 있었으니 기다림이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것 같다.

 

3년을 기다려 남편의 군 제대 후 그녀는 결혼과 함께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이때는 음악보다 남편이 더 좋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미며 행복하게 사는것이 그녀에게는 더 소중했다. 남편 역시 졸업 후 안정된 직장을 구했고 첫째 딸이 생기고 아들이 태어나고 더 큰욕심없이 가정에 안주하며 행복한 생활을 즐겼다.

제2의 음악인생 시작하다…

 

안정되고 행복한 생활속에서 아이들은 모두 성장해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남편은 남편대로 큰 굴곡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주니 이젠 나 자신을 위해 가치있고 보람있는 일을 할 시간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음악 이외에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젊은시절 추구했던 음악세계와는 또 다른 세계가 보였다. 자신만의 음악적 성취보다는 더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는 음악, 더 나아가 후배 음악인, 젊은 뮤지션들의 서포터로서의 음악인생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민자로서  동포사회, 한인들의 문화생활에도 기여하고 싶었다.

 

첫번째 선택은 보스턴에서 합창단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마침 뜻이맞는 몇몇 분들과 이민백주년행사의 음악회를 성공시키면서 보스턴에 정식 합창단을 만드는데 뜻을 모으게 되었고 기존에 있던 어머니 합창단을 모태로 보스턴한인합창단이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다.

제2의 음악인생은 합창단 활동과 함께 활짝 열렸다.  합창단 단장을 맡으면서 매우 활동적으로 크고 작은 음악회를 한인사회에 선사했다. 특히 수년간 한국전 참전용사를 위한 행사에서 아리랑을 합창할 때 함께 따라 부르며 기립박수를 보내주던 노병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에 뿌듯함이 전해진다고 한다.

 

또한 이민생활 30년이 지나면서 노래 이외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합창단원들이 함께 노력하며 만들어 낸 소중한 화음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을까?  음악을 통해 우리 한인사회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자신의 성취와 만족을 위해 부르던 노래가 이젠 함께하는 노래의 세계로 그 폭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 시기가 그녀가 합창단 단장으로서 한인회 부회장, 서울대 동창회장, 민주평통 부회장 등 각종 한인단체에 참여하여 한인사회를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활동한 시기였다. 이유는 한인들이 “함께 나누며 하나되는 시간” 이 너무 소중하고 감동스러워서였다.

한미 커뮤니티가 함께한 “평화통일 음악회” 그리고 한인 오케스트라의 탄생 

창단 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한미 커뮤니티가 한자리에 모여 음악을 통한 감동의 기회를 나눌 수 있는 "한미수교 130주년 기념 음악회"가 보스턴총영사관의 후원 아래 보스턴한인합창단의 주관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MIT 대강당에서 800여 관중과 함께 250명의 한미 합창단원, 한인연주가들 로 구성된 full Orchestra 가 한목소리로 부르던 Beethoven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 의 감동으로 가슴벅찼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한미가 함께한 평화음악회에서처럼 ‘하나가 되는 한인사회, 보스턴에서의 멋진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긍지’ 를 모두와 나누고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차례의 큰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끝낸 그녀에게 한가지 목마름이 간절하게 다가왔다.  바로 우리도 우리만의 오케스트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한인오케스트라를 조직하기 위해 박진욱 지휘자와 함께 마음을 같이하여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재정을 꾸리고 젊은 뮤지션들을 만나 한인오케스트라의 필요성을 이해시키며 열정적으로 뛰었다.  돌아보면 힘들고 버거운 일이였지만 그때는 우리 한인을 대표하는 오케스트라가 꼭 생겨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줄 모르고 지냈다고 한다. 올해로 창단 5주년을 맞는 우리들의 화음보스톤 오케스트라는 이렇게 생겨났다.

화음보스턴오케스트라, 열정적인 활동, 그리고 한반도 평화 컨서트

 

많은 우여곡절속에 뜻을 함께하는 지인들과 “화음보스턴쳄버오케스트라”를 탄생시켰다. 합창단 활동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연습하고 노래하는 동호회적 성격을 띠었다면 화음보스턴은 정식으로 음악을 전공하는 전문 뮤지션들의 음악단체이다. 당연히 오케스트라의 단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받게 되었다.

 

후원자들을 찾고 오케스트라의 살림을 꾸려나가야 했고 각가지 공연기획에서 공연까지 정말 숨 돌릴 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일반 사람들은 그저 공연을 위해 장소 섭외해서 연주하면 끝 아닌가 한다. 하지만 크던 작던 공연 하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 된다. 공연의 컨셉을 정의하고 컨셉에 맞는 곡을 선정하고 재정을 구비하고 지휘자는 각 레퍼토리에 필요한 단원들을 모으고  수 많은 연습을 해야한다. 단원들은 단원들대로 호흡을 맞추는 동안 단장은 음악회를 위한 재정이나 프로그램북 제작, 홍보 ,후원단체 섭외, 티켓판매 등으로  뛰어다니며 동분서주한다. 그  와중에도 단원들의 리허설 간식까지 챙기고 세심히 살펴 만족할 만한 무대가 될 수 있도록 모든 주위를 살피는 것 역시 장단장의 몫이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장단장은 열정 하나로 진행해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힘들어 죽겠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연주하는 무대는 아니지만 좋은 음악회를 통해 한인들과 클래식의 세계를 함께 나눌 수 있고 단원들에게는 화음 음악회를 발판으로 더 큰 무대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이 모든 과장을 이겨내게 한다. 실제로 많은 단원들의 비자문제도 해결해주고 뉴욕필, 보스톤심포니에 진출하고 교수가 된 단원들도 많다. 미주류사회에도 이제 많이 알려져 미언론에서 ‘ Hidden Jewel(숨겨진 보물)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이런 장단장의 노력으로 "화음 보스턴"은 우리 한인사회에 정말 많은 음악 선물을 안겨주고 있다. 봄, 가을 1년에 두번 정기 음악회를 중심으로 "한반도 평화 컨서트 시리즈", "탈북난민돕기 자선음악회", "세월호 희생자 애도 음악회", "소년 소녀 가장돕기 자선 음악회", "장학기금 모금음악회", "아프리카 어린이돕기 음악회", "시리아 난민돕기 음악회" 등 한인오케스트라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음악회를 해오고 있다. 우리 뉴잉글랜드 동포사회에 크고 작은일이 있을 때 마다 "화음 보스턴"은 우리곁으로 달려오는 음악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달래고 희망과 용기를 선물하고 있다.

프로바이더의 삶, 화음 보스턴이 있어 나는 감사하다.

 

"화음 보스턴" 장수인 단장의 목표는 명확하다. 사회에 기여하는 음악단체를 키우는것이다. 또한 보스턴 지역 젊은 뮤지션들에게 많은 무대 경험을 제공하여 더 큰 세계의 무대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발판을 마련해 주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추구하는 제2의 음악인생이요 음악계 선배로서의 역할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를 위해 그녀는 작년 여름 또 다른 시도를 추구했다.  바로 한국에서 보스턴 뮤지션들의 컨서트를 기획하고 실현 시킨것이다. 바로 "화음 보스턴 쳄버 오케스트라"의 한국 진출이다. 보스턴에서의 공연과 달리 많은 무리가 따르는 컨서트였지만 그녀는 이 모든것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보스턴의 재능있는 뮤지션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이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일념 하나로 충북 속리산에서의 야외음악제 ‘Nine Valley Music Festival 을 박진욱 음악감독과 함께 만들어내었고 대성공을 이끌어 매년 한국방문연주를 기획하고있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음악을 추구하기 보다는 음악계 선배로서 후배들을 위한 음악 서포터이자 프로바이더의 삶을 택했다. "화음 보스턴"의 활동이 많은 후배들에게 더 큰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소중한 통로로 활용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클래식 음악을 통해 한인사회에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화음 보스턴"이 되었으면 한다는 작은 희망도 함께 밝혔다.

 

인터뷰를 마무리 하며….

 

인터뷰 내내 자신은 "참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적으로 반복했다. 지금껏 배운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소신과 믿음 하나로 하고 싶은 일을 맘것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받았으며 내가 하는 일에 한마음으로 함께 해주는 분들이 있으니 이보다 더 감할 수 는 없다는 것이다. 특히 남편에 대한 고마움에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껏 내가 하고 싶은 일, 또 하고자  목표를 세운일에 가장 많은 용기와 힘을 보태 준 사람이 바로 남편 이라며…

 

인터뷰 말미에 그녀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진다. "피아니스트였던 90세의 어머니는 아직도 제 노래를 들을때가 제일 행복하시다고 하네요!. 그래서 저는 엄마가 계신 노인병원에서 아직도 노래를 많이 한답니다."

 

그렇다 노래와 음악은 그녀 인생의 전부라 말 해도 과언은 아닌것 같다. 늙으신 어머님을 위해 노래하고 젊은 후배들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떠 올리며 나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조용히 99.5 클래식 방송에 채널을 맞춰 보았다.

Boston Life Story TV

보스턴 라이프 스토리는 보스턴 한인들의 소소한 삶을 정감있게 표현하여 함께 공유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운 보스턴의 삶을 소개하고자 하는 사이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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