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OPLE Interview

불운의 화가 유수례

‘Dream Bird’

약속된 인터뷰를 위해 가을 단풍이 한창인 I -93 를 타고 달리는 동안 캔버스 가득 버밀리온(vermilion)으로 채색된 그녀의 ‘Dream Bird’ 시리즈가 떠올랐다. 몽환적인 생명력, 그 안에는 늘 희망을 상징하는 새가 등장한다. 작품의 변화를 위해  2004년, 뉴 멕시코를 여행하며 영감을 얻어 그려낸 작품들이라고.


그녀가 한창 잘나가던 한국을 등지고 작품의 변화를 꿈꾸며 미지의 땅에 온 것을 후회하진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광화문 재개발 모습을 담은 그림 광화문

사진: 유수례 화가의 작업 모습 

고맙지만 그리울 수 없는 이버지

 

어린 시절 수례에게 그림을 가르쳐  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녀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건축 설계사였던 아버지는 그녀의 그림 재능을 알아 차리고 적극 권했던 후원자였다.  몸이 허약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녀는 그림을 그리며 위안을 얻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그리고 그림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녀에게 가장 큰 아픔을 안겨준 사람이기도 하다. 공사현장을 오가던 아버지는 집에 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그녀가 중학교를 다니던 어느날부터 아예 발길을 끊고 집안을 돌보지 않았다.

 

엄마는 행상을 나가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수례는 엄마를 도와야 했다. 동네 아이들을 가르치고 돈을 벌어 육성회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그림을 그릴 재료를 사는 것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형편. 아이들이 그리다 망쳐 버린 캔버스가 그녀의 캔버스가 됐다. 어두운 현실은 그녀의 감성에 각인됐고 그녀의 그림들은 주로 소외된 삶을 주제로 삼게 됐다.

화가의길, 하지만 멈추지 않는 시련

학교에서 인정받은 그녀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예고에 진학했다. 그리고 가계를 도와야 했기에 집 한켠 조그만 공간을 화실로 만들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1970년대만 해도 예체능 분야를 전공하는 것이 환영 받지 못하던 때. 시대적 편견은 큰오빠를 비켜가지 않았다. 동생이 그림쟁이가 되는 것을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던 오빠는 데생용 석고상을 수차례 부수고 심지어 동생의 손가락을 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수례는 말없이  저항하며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시련은 늘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왔고, 머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어 미술대학 진학을 코앞에 두고 큰 오빠도 세상을 떴다. 당시 예고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던 그녀는 명문 미대 진학을 염두에 뒀으나 포기하고 직장을 잡아야 했다.

 

 “어려서부터 내 마음에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이 있었어. 주체할 수 없을 때는 붓 대신 나이프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지. 내 안의 슬픔을 도려내 캔버스를 채우듯 나이프로 질감있는 작품들을 그려댔어”.

 

그렇게 4~5년간 직장을 다니며 화실 운영을 병행하던 그녀는 꿈에 그리던 미대 진학을 시도했다. 못이룬 꿈을 이루기 위한 이유도 있었고, 아무리 실력있고 인기있는 화가라도 대학 졸업장이 수반되지 않으면 화단에 발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하지만 자신만만했던 화가에게 날아온 것은 불합격이었다. 그때만해도 혈기가 넘쳤던 그녀는 지원했던 대학의 사무총장을 찾아가 이유를 물었단다. 이유인즉, 입시제도가 바뀌는 바람에 내신성적이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

 

“내가 다닌 데가 예고였잖아, 거기서 내 실력을 인정했으니, 수업을 뒷전으로 하고 그림을 그리러 나가도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 성적이 들쭉날쭉할 수밖에…하지만 후회는 없어, 거길 갔으면 교수가 됐거나 학자가 됐을테니… 난 그림쟁이가 좋아”.

 

이후부터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작품생활에 매진하며 미대 입시생들을  지도했다.

성공적인 전시회, 화가의 반열

 

화가는 1989년 첫전시를 열게 됐다. 작품들은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 고뇌하며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것들로 일관됐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고 운보 김기창, 권옥연, 고 손상기 등 당시대를 풍미했던 화가들로부터 호평을 들었다.

 

전시회를 계기로 화단에 오른 화가는 고 손상기 화가와 공동작업을 하는 한편 여러 군데 화실을 오가며 유명 미대 합격률이 높은 강사로도 유명세를 탔다. 당시 그림을 배우던 포루투갈 대사가 “포루투갈 대학에 와서 미술을 가르쳐 달라”고 제안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

 

때마침 광화문 인근에 재개발이 시작됐다. 화가는 작은 집들이 허물어지는 것을 매일 보며  달동네 시리즈를 그렸다. “집을 잃는 그 사람들이 꿈마저 잃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렸다”는 게 화가의 말이다.

 

달동네 시리즈를 비롯한 그녀의 작품들이 수차례 전시회를 통해 알려지자 그녀는 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됐다. 하지만 가난은 쉽사리 그녀를 떠나지 않았다. 그녀의 가난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었던 친구들이 그녀의 화실을 강남으로 옮겨줬다.

강남으로 옮기면서 수입이 늘어났다. 달동네 그림들도 잘 팔리기 시작했다. 화가는 생활고에서 자유로워졌고 비로소 마음에 여유라는 게 생겼다. 절로 작품의 톤이 밝게 변하기 시작했다.

Long Walk Home

미칠 수 있어 불행하지 않은 "방랑자의 혼"

천재적인 화가는 죽은 후에 날린다지! 빈센트 반 고흐나 천경자처럼…뉴햄프셔 라이(Rye) 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류 화가 유수례(1958년 생) 씨를 나는 감히 그 반열에 올린다. 가난하고 병든 ‘불운’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미칠 수 있는, 그래서 불행하지 않은 이 화가를 향한 바램이다.

버밀리온 색채로 환상적인 생명력을 그린 Dream-Bird

뉴햄프셔로 날아온 새
한창 ‘달동네’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고 있을 무렵 화가는 가슴이 먹먹했다. 가난하고 우울했던 시절의 감성에 익숙한 화가는 ‘이건 뭔가 이상해’라며 풍족함이 낯설었다.
 
“내 작품은 내놓으면 잘팔렸어. 근데, 그게 난 이상한거야, 대중적인 작품은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어. 그때 하필이면 모 대학에서 연락이 왔지 뭐야, 대학원에 진학하라고…그길을 갔더라면 지금은 교편을 잡고 있을거야...”
 
잠시 고민하던 화가는 주저없이 미국의 뉴햄프셔 주로 향했다. 그때가 2003년경. 사촌동생이 전해준 미지의 땅, ‘타히티’처럼 화가들이 살고 있다는 섬을 향해.
 
처음본 낯선 땅은 아름다웠다. 그림같이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은 곳곳이 나무며 숲이 어우러져 신비로웠다. 더 이국적인 것을 찾아 여행도 다녔다. 뉴멕시코의 버밀리온에 매료된 것이 이 시기.

찾아온 행운, 대책없는 그녀

뉴햄프셔에 화가들만 사는 섬같은 건 없었다. NHIA(New Hampshire Institute of Art)에 적을 둔 그녀는 비자를 유지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해야 하는게 현실이었고, 찬란한 햇빛 아래 서있는 섬 대신 어두운 집 지하실에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갖고 온 돈이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며 줄어들고 생활고가 다시 시작될 즈음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할 때  NHIA에서 교수직을 제안해 왔다. 당시 NHIA 에서는 그녀의 그림을 수업 교재로 사용하곤 했을 정도라니, 행운이 찾아 온 것. 하지만, 영어가 자유롭지 않은데다 그림 작업에 제한을 받는 것이 싫어서 마다했다는 그녀. 대책 없는 화가다.

화려한 탄생, “아시아의 샤갈”

 

이때만 해도 그녀에게는 야성적인 패기가 있었다.

주변에 있던 뮤지엄(Coolidge Center for the Art)를 찾아 들어가 한국에서 개최했던 전시회 팜플렛을 들이 밀었다. 그정도면 그들이 관심을 가질 줄 알았다는 것.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답지 않았고, 수차례 찾아갈 때마다 기다리라는 대답만 반복했다.

 

화가가 지쳐갈 무렵 뮤지엄에서 연락이 왔다. NHIA 대학의 교수들이 뮤지엄에 그녀를 추천한 것. 화가가 본격적으로 뉴햄프셔 지역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때다.

 

미국에서의 첫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뉴햄프셔 바닷가를 소재로 그린 ‘오션 댄싱’ 등 4작품이

전시되자 지역 언론사들은 앞다퉈 그녀에 대해 다뤘다. 이때 포츠머스 헤럴드는 그녀를 “아시아의 샤갈”이라고 평했다. 이후 뮤지엄은 수년간 그녀의 대작들을 전시했다.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전시회를 하던 화가는 2013년 뉴햄프셔 라이(Rye)에 갤러리를 오픈해 또한번 주목 받는다. 갤러리 오픈 소식을 들은 뮤지엄 디렉터는 “너 때문에 우리는 곧 문을 닫게 될거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고.

 

하지만, 갤러리 운영은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지역 예술인들을 알리고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통로는 됐지만, 생계라는 무거운 짐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갤러리 한 쪽에서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가난은 지독히도 그녀를 사랑했다.

교통사고, 사투, 후유증

불운은 그칠 새 없이 화가를 따라다녔다. 삶의 무게에 억눌려 있을 때 교통사고까지 당한 것.

신호를 받아 정지해 있던 화가의 차를 뒤따라 오던 트럭이 들이받은 탓에 왼쪽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부상을 당했다. 타고 있던 차는 완전히 폐차됐을 정도라니, 그나마 목숨을 건진 것이 다행이었다.

지금껏 3년째 수차례 수술을 거쳐 치료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통증이 남아 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팔이 아파서 파레트 들 수가 없어. 큰 캔버스를 사용할 수가 없어서 작은 그림들만 그리는데, 체력이 금방 쇠진해지곤 해. 그래도 돈을 벌어야 사니까 학생들을 지도하는 건 안간힘을 다했지.”

 

화가에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이때였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 지독한 외로움, 궁핍한 현실…. 이 모든 것보다 더 두려웠던 건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었으니까.

 

“평소에는 기도를 안하는데, 아플 때는 기도해 ‘하나님, 제가 손가락만이라도 움직이게 해주세요. 그림만 그릴 수 있게 해주세요’라고.”

 

지난 봄, 움직이지 못해 굳어있던 왼쪽 팔의 근육들을 뼈에서 떼어놓는 수술을 받은데 이어 최근 다리의 심한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척추주사까지 맞은 그녀는 다음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갤러리에 새로 선보인 ‘Winter of NH’는 지난 겨울, 팔/다리의 통증과 치열하게 싸우며 그린 것이라고. 그래서일까, 나뭇잎을 다 떨군 채 눈밭에 서있는 나무들에게서는 그 뒤로 스며드는 햇빛과 어우러져 강하게 꿈틀대는 생명력이 느껴진다.

 

화가는 이제 담담히 삶의 노래를 붓으로 그릴 수 있게 됐다. 너른 바다 저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넘나들며 왈츠를 추고 나뭇잎을 간지르는 바람에게 속삭인다. “난 불운하지만 불행하진 않다”고.

고흐만 미쳤을까?

‘공수레 공수거’를 말하며 결혼도 마다하고 그림에만 매달려 욕심 없이 살아왔던 이 화가가 딱 하나 욕심을 부리는 게 있다.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들을 한 곳에 모아 둘 뮤지엄을 갖는 일이다.

자칫 교만하다는 오해를 살 수 있어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림 팔기를 싫어하는, 가난하고 병든 화가로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인터뷰 말미에 그녀가 한 말을 되뇌이며 그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졌다.

 

“허허 너른 벌판에서 딱하나 커다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 죽으면 좋겠어.”

 

고흐만 미쳤을까?

Winter of NH

글/ 사진 : 김현천hhyuncheon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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